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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수시절 83] 이태호 - 1980년대를 수놓았던 기교파 골잡이 ①

2024-05-22 14:12:10 1,454


인터뷰 중인 이태호.
 

이태호(63)은 1980년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였다. 

대표팀과 소속팀 대우 로얄즈에서 미드필더 또는 공격수로 활약한 그는 센스있는 볼 터치와 정확한 슈팅을 자랑했다. 172cm의 크지 않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위치선정과 수비를 따돌리는 지능적인 움직임으로 수많은 골을 기록했다. 이 때문에 독일의 전설적인 골잡이 게르트 뮐러에 빗대 ‘한국의 게르트 뮐러’로 불렸다. 특히 20대 중반에 한쪽 눈을 실명하는 큰 부상을 당하고도 이를 꿋꿋히 극복하는 ‘인간 승리’의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국가대표로 1980년부터 1990년까지 A매치 통산 80경기에 나서 24골, K리그에서는 1983년부터 10시즌을 뛰면서 183경기 출전에 57골 27도움을 기록했다.   

환갑을 훌쩍 넘긴 지금도 축구 감독으로, 교수로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이태호를 만났다. 

 

- 다른 스타플레이어 출신 축구인들에 비해 근황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궁금해 하는 올드팬들이 많다.

오랫동안 언론에 얼굴이 안 나와서 그런지 팬들이나 축구계에서도 사라진 줄 알고 있더라(웃음).  2002년 대전 시티즌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 몇 군데 팀을 거쳤다. 그러다가 지난 2017년에 충북 음성에 있는 강동대 축구부 창단 감독으로 와서 지금까지 있다.  스포츠건강관리학과 교수도 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 선수시절 화려한 테크닉을 자랑하던 분이라 어릴 때부터 특출했을 것 같다. 어떻게 축구를 시작하게 됐나.

대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4남 1녀중에 막내였다. 골목에서 애들하고 공도 차고 배구도 하면서 놀았다. 또래들보다는 운동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특별 활동 시간에 축구를 자주 했는데, 선생님들이 “태호는 축구하면 잘하겠다” 이렇게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마침 다니던 자양초등학교에 축구부가 있었다. 좋아하기도 했고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아서 5학년 때부터 정식으로 축구부 선수가 됐다.

 

- 선수 시절 주로 미드필더나 공격을 보았는데, 초등학교부터 그랬나?

내가 어릴 때는 주로 2-3-5라는 포메이션을 썼다. 수비 둘, 미드필더 셋, 공격 다섯명이었다. 공격수 5명 중에 가운데에 3명을 배치했다. 정 중앙은 센터포워드, 약간 오른쪽은 라이트 인사이드, 왼쪽은 레프트 인사이드라고 불렀다. 나는 센터포워드를 보기도 하고, 지금은 중앙 미드필더에 해당하는 센터 하프를 맡기도 했다.

 

- 어릴 적에 선망하는 선수는 누구였는가?

박스컵(박대통령컵) 국제축구대회가 그 무렵에는 인기여서 TV로 중계를 많이 보았다. 김정남, 이회택 이런 선수들이 한창 유명할 때였는데, 나도 저런 분들처럼 국가대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내가 공격수니까 이회택, 차범근 이런 선수들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내가 그분들처럼 스피드가 뛰어난 스타일이 아니라서, 사실은 수비수였던 김정남 선배님을 제일 좋아했다. 김정남 선배님은 보통 수비수들처럼 터프하게 하질 않고 아주 지능적으로 플레이를 하셨다. 그래서 나도 김정남처럼 저렇게 영리하게 공차는 선수가 되고 싶었다.

외국 선수 중에는 우리 초등학교 때는 펠레가 가장 유명했으니까, 펠레를 우상으로 삼고 펠레처럼 플레이해보고 싶었다. 

 

- 선수로 성공할 수 있겠다고 확신이 들었을 때는 언제였나?

초등학교 때 충청도 지역대회도 나가보고, 서울에서 하는 전국대회에도 참가했다.  5학년 때 중앙대학교 총장배를 흑석동 중앙대 운동장에서 했다. 서울 우이초등학교와 비오는 날 첫 시합을 했는데, 8-0으로 이겼고 내가 혼자 7골을 넣었다. 다음날 신문에 ‘어린이 펠레가 나타났다’ 이렇게 기사도 나오고 해서 아주 기뻤다. 

경기에 나가면 거의 골을 넣었고, 우리 팀이 대회에서 10골을 넣었다 하면에 8골, 9골은 내가 만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열심히 하면 가능성이 있겠구나 생각은 했다.

 

- 남들보다 뛰어난 특기나 장점은 무엇이었나?

득점 감각이 남달랐던 것 같다. 똑같이 차도 다른 선수는 안 들어가는데, 내가 찬 공은 골이 됐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대포알처럼 강한 슈팅을 쏘는 것도 아니었다. 기본기도 다른 선수들보다는 좀 좋았던 것 같고, 특히 볼 컨트롤을 잘 했던 것 같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대표팀에서 친구였던 정해원이가 항상 그랬다. “태호야, 너는 골문 앞에서 공을 참 잘 잡아놓는다. 한 번에 슛을 바로 할 수 있게끔 만들어놓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이 너의 공을 못 뺏는 거다”.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다른 선수들보다는 생각이 좀 빨랐던 것 같다.

사실 내가 발이 느리다. 사람이 스피드가 없으면 다른 기술을 갖는 모양이다. 



대전상고 시절 모습.
 

- 대전상고 시절 전국대회를 휩쓸면서 맹활약했다. 덕분에 고3때인 1978년에 청소년 대표에 발탁되면서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는데, 기쁨이 컸을 것 같다.

기쁘기도 했지만 부모님 생각이 먼저 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 어머니가 잇따라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고교선수권대회에 참가하던 10월에 세상 뜨시고, 어머니는 한달 뒤인 11월에 돌아가셨다.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부모님은 안 계시지만 형님 누나들한테 기쁨과 위안을 드려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때는 식구들이 다들 힘들게 살 시기였으니까. 그 뒤로 대회를 나가든지,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아버지, 어머니한테 감사드렸다.

 

-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슬픔을 어떻게 극복했나?

두 분 돌아가시고 우울증에 걸려서 정신과 치료도 받고 그랬다. 당시에는 그게 우울증인지도 몰랐다. 계속 울기만 하고, 무슨 일을 해도 흥이 안 나고 너무 힘들었다.

대학 들어와서도 쉽게 낫지를 않았다. 대학교 은사님이 박영환 감독님(* 1990년대 프로축구연맹 사무총장 역임)이었는데, 저를 안타깝게 보셨는지 이런저런 조언을 많이 해주셨다. 뭐든지 자꾸 즐기라고 하시면서, 선배들하고 나이트클럽에도 놀러가고 어쨌든 재미있게 지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친구들, 선배들 따라 어울려 다니고 이러다 보니까 어느날 우울증도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치유가 됐다. 원래 성격이 활달한 편이라 그래도 이겨낼수 있었던 것 같다. 

 

- 오래전에 최순호 수원FC 단장에게서 들었는데, 워낙 입담이 좋아서 대표팀이 외국 나갈 때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선수들이 전부 이태호 옆에 모여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랬다(웃음). 놀기 좋아하고 장난 좋아하고 어울리는 걸 좋아했다. 이야기하다 보면 선수들이 어느새 내 주위에 다 몰려와 있었다. 그러면 더 신나서 막 거품 물고 얘기하고(웃음).



1978년 청소년대표팀에 뽑혔을 때.
 

- 1978년 방글라데시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대회에 참가했다. 북한을 준결승에서 만났을 때,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와 이긴 경기를 올드팬들은 기억할 것 같다.

나도 잊을수 없다. 그 경기 비디오 테이프를 갖고 있어서 심심하면 한번씩 돌려본다. 그 때는 남북 대결이 정말 드물었던 시기였다. 우리 팀에서는 제일 고참이 한양대 2학년이던 박항서 선배였고, 다른 선수들은 대부분 대학교 1학년 아니면 나처럼 고등학교 3학년이어서 열여덟 열아홉살 정도였다. 

그런데 북한 선수들은 전부 스물셋에서 스물다섯 정도로 보였다. 턱밑에 수염도 많고, 얼굴이 완전 형님들이었다. 나이 차이가 있어서인지 실제 붙어보니 우리보다 힘도 있고... 남북 대결이니까 엄청나게 긴장해서 무척 힘들었다. 관중도 10만명쯤 되었던 것 같다.

연장전까지 120분을 뛰었는데 사실 우리가 많이 밀렸다. 그래도 무조건 이겨야 하는 거니까 잘 버텨서 승부차기까지 끌고 갔다. 그런데 승부차기에 나서는 5명 키커 명단에 내가 없었다. 원래 경기중에도 페널티킥을 얻으면 내가 차는 거였다. 그런데 경기 전날 페널티킥 연습을 하는데 내가 찬 공을 우리 골키퍼가 다 막았다.  감독님이 그걸 보고는 불안했는지 북한과 승부차기 명단에 나를 뺐다.  

재미있는 것은 그때 우리 팀에 김석원이라고 공격수가 있었는데, 우리 팀 감독인 김찬기 선생님 아들이었다. 석원이도 승부차기 명단에서 제외됐다. 내 생각에 자기 아들이 승부차기 못넣으면 역적될까봐 빼놓은 것 아닌가 싶었다.(웃음). 석원이가 나중에 대학과 대표팀에서 나하고 친하게 지낸 친구였는데, 이 녀석이 배포가 없고 마음이 좀 여리긴 했다.

승부차기에서 북한 선수들이 차는 것은 우리 박영수 골키퍼가 제대로 못막고 그대로 5명이 다 성공시켰다. 근데 우리 선수들도 다 넣기는 했지만 골키퍼 손에 맞고 가까스로 들어가고, 골대 맞고 들어가고 이렇게 좀 위험하게 들어가서 불안했다.

5 대 5가 되어서 여섯번째 찰 사람 정해야 되는데 누가 섣불리 차겠다고 나서겠나. 할수 없이 내가 여섯 번째 키커로 나갔다. 다행히 북한의 나봉기라는 선수가 찬 것을 우리 박영수 골키퍼가 잘 막고,  그 다음에 내가 성공시켜서 6 대 5로 이겼다.

 

- 그때 청소년대표팀 동료였던 정해원, 장외룡, 박항서, 김석원, 이상용, 이길용 이런 분들은 나중에 대표선수까지 했으니 나름대로 성공한 세대라 할수 있을 것 같다.

박항서 선배는 2년 선배여서 내가 대전상고 1학년때 경신고등학교와 경기하면 한번씩 봤다. 동기 이길용이는 영등포공고 시절 건국대 총장배 고교대회에서 잘해서 그때 유심히 봤다. 이상용(나중에 프로심판 역임)도 영등포공고 나왔는데 중학교 때부터 뛰어났다. 김석원은 중대부고 3학년 때 아주 잘해서 기억을 하고. 

그러니까 청소년대표팀에 뽑히기전에 서로 친하지는 않아도 우리 또래들 중에 잘하는 애들이 이렇게 있구나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상비군이라고 해서 청소년 대표팀 선발하기 전해 전국에서 잘하는 선수들 80명 정도를 뽑아서 훈련을 시켰다. 그 다음에 청백홍황 이렇게 나눠 연습경기를 해서 최종 멤버를 뽑았다.



1978년 방글라데시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대회에 참가한 선수들. 앞줄 가운데가 이태호. 뒷줄 왼쪽 두번째부터 정해원, 장외룡, 박항서의 얼굴도 보인다.
 

- 고교 무대 최고의 선수였고 청소년 대표로 활약했으니, 스카우트 경쟁이 굉장히 치열했을 것 같다. 어떻게 고려대로 가게 됐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연세대를 좋아했다. 그래서 무조건 연대 가겠다고 했다. 다른 선수들이 “나는 고대가 좋아”, “나는 고대 갈거야” 이래도 나는 죽어도 연대였다. 왜 연대를 좋아했냐면 연대 축구는 볼을 예쁘게 차는 스타일이고, 나처럼 기술적으로 찼다.  반대로 고대는 무식하게 들이받고 완전히 북한 축구 스타일처럼 하는데, 나는 그게 싫었다.

거기다가 대전상고 오근영 감독님이 연대 출신이고, 또 그때 연대 야구 감독하시던 분(이재환)이 내 사촌 형님이었다. 그래서 연세대에서는 사촌 형에게 “이태호를 우리 학교로 못데리고 오면 당신도 그만둬”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오근영 감독님이 연대를 못가게 했다. 대전상고 선배 3명이 그전에 연대로 진학을 했는데, 선수 생활을 화려하게 못하고 다 중간에 그만뒀다면서. 그래서 감독님 본인은 연대 나왔어도 나는 연대 안보내겠다고 해서 할수 없이 고대로 가게 됐다. 처음엔 가기도 싫고 좀 힘들었다. 그런데 참 인연이라는 게 있는지, 내가 고대를 가서 성공한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선택을 잘했다고 여긴다.

 

- 그 무렵 차범근 선수가 ‘이태호가 한국 축구의 새로운 희망이다’ 이런 식으로 언론에 말했다고 하던데.

차범근 선배님이 독일 분데스리가 가기전에 코카콜라 장학금을 1년간 받으셨다.  축구 유망주에게 주는 장학금이었는데, 차범근 선배님 뒤로 내가 2년을 받았다. 그런 장학금을 받으니까 ‘내가 좀 볼을 잘 차나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범근 선배님과는 나이 차이가 있어서 내가 고대 들어갈 때 선배님은 공군에 있었다. 제대후에 곧바로 독일로 가셔서 선수 생활은 같이 하지 못하다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때 대표팀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함께 연습하면서 차범근 선배가 “태호야, 너는 골넣는 재주가 참 좋다. 독일의 게르트 뭘러같다”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세계적인 선수가 그런 칭찬을 해주시니까 정말로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 1979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대회(U-20 월드컵)에 참가했다. 한국 선수 최초로 이 대회에서 골을 넣었지만 아쉽게 조별리그 탈락을 했다.

아까 얘기한 것처럼 아시아 청소년대회에서 북한을 이기고 이라크와 공동 우승해서 두 팀이 세계 청소년대회를 처음 나간거다. 제2회 대회였는데, 마라도나가 이끈 아르헨티나가 우승했던 대회다.  파라과이, 포르투갈, 캐나다와 같은 조에 들어가서 1승 1무 1패를 했다. 그 정도면 8강에 올라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결국 떨어졌다.  

굉장히 기대를 하고 열심히도 했는데 상대팀 정보라든가 이런 게 많이 뒤떨어졌던 시절이다. 특히 코칭 스태프에서 우리 선수들한테 너무 겁을 많이 주었다. 예를 들어, 호텔 방에다가 상대팀 선수들 사진을 걸어놓고 이 선수는 연봉 10억짜리야, 이 선수는 100미터가 10초 5야, 여기서 한번 뛰면 벌써 저쪽 골대에 가 있어, 이런 식으로 우리 선수들한테 세뇌를 시켰다. 우리는 정말로 상대편이 세계적인 선수들인가보다, 이렇게 우물안 개구리처럼 생각했다. 막상 붙어보니 그 정도는 아닌데.

또 경기가 열렸던 고베 경기장 잔디가 융단처럼 좋지, 볼 좋지 흠잡을 게 없었다. 그런데서 볼을 차니 진짜 우리 촌놈들이 잘하다가도 어이없이 한 골 먹고, 또 좀하다가 한 골 먹고, 그렇게 파라과이한테 세골 먹었다. 그 다음에 캐나다와 붙어서는 내가 한골 넣어서 1 대 0으로 이겼고, 포르투갈과는 0 대 0으로 비겼다.

우리가 캐나다를 이긴 뒤에 그 경기장에서 파라과이와 포르투갈이 게임을 했다.  파라과이가 이겨야 우리가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운동장 스탠드가 아주 낮았다. 그리고 볼 3개로 경기를 했다. 그러다 보니 공 2개가 담장 밖으로 나간 상태에서 나머지 공 1개마저 멀리 차내면 볼주워 오는데 5분 걸렸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끄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는거다  결국 포르투갈이 이겨서 우리는 탈락했던 것이 기억난다. 



1979년 고려대 1학년 때 대통령배전국축구대회에 참가한 이태호(왼쪽 선수).
 

- 세계청소년대회 갔다 와서 1979년 가을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에 처음 출전했는데, 경기 도중 난투극이 벌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사건 당사자로서 비난도 많이 받았을텐데 그때 이야기 들려달라. 

예전에 차범근 선배가 “수없이 많은 경기를 해봤지만 고연전(연고전)이 제일 어려웠다”고 말할 정도로 나 역시 고연전이 무척 힘들었다. 무조건 연대는 이겨야 한다고 선배들에게서 수없이 이야기를 들은지라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갔다.

그때 연대에서는 수비수였던 이장수 선배가 4학년이었고, 신문선, 장외룡 선배도 있었고, 동기로는 정해원이 있었다. 이상용이 사이드로 치고 들어가서 내준 것을 내가 이장수 선배 태클 살짝 피해서 선취골을 넣었다. 그렇게 전반을 1대0으로 이기고 라커룸에 들어갔다. 그런데 감독님이 주장을 맡았던 이상철(* 2004 아테네 올림픽대표팀 코치 역임) 선배를 후반 명단에서 뺐다. 그러자 상철이 형이 캐비넷을 주먹으로 때려부시고 난리를 쳤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오늘 졌다가는 선배들에게 맞아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반에 들어가서 연달아 3골을 먹고 10분 남긴 상황에 1대3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동기인 이상용한테 “상용아, 이대로 끝나면 형들한테 맞아죽으니까 게임 방해해서 끝내자” 이렇게 말해서 서로 약속이 됐다. 그리고는 하프라인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연대 김태환 선배에게 내가 태클을 세게 넣었다. 보통 때 같으면 “태호야, 흥분하지 마 임마” 이러면서 그냥 토닥거리면서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태환 선배가 나한테 욕을 했다. 나도 열받아서 그 선배를 업어치기해버렸다. 유도 선수도 아니고, 사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웃음). 

그 다음에 연대 선수가 오세권 연대 골키퍼(전 국가대표 오범석 아버지)에게 백패스를 했다. 그때는 백패스를 해도 골키퍼가 손으로 잡을수 있던 시절인데, 세권이 형이 볼을 잡는 순간에 내가 또 태클을 한거다. 그러니까 세권이 형도 흥분해서 내 뒤통수를 탁 쳤다. 그 모습을 보고 이상용이가 달려와서 이단옆차기로 세권이 형 가슴을 냅다 차버렸다. 

그렇게 발단이 되어가지고 선수들끼리 패싸움이 나고, 연대 응원단이 운동장에 뛰어들어와서 우리 선수를 응원 깃발로 때리면서 싸움이 더 크게 벌어졌지. 결국 심판이 게임 종료 선언하고, 경찰까지 출동했다. 그 와중에 우리 고대 선수들은 응원 단상에 올라가서 우리가 이겼다며 응원가 부르고 그랬다. 솔직히 말해서 이기기는 뭘 이겨? 진거지(웃음). 매너도 꽝되고 그냥 완전히 깡패된거지. 그 다음해인가 김정남 감독님이 고대 감독으로 새로 오셨는데 나하고 이상용이는 엄청 혼났다. 매너 나빴다고. 

 

- 1980년에 아시안컵 앞두고 드디어 국가대표로 뽑혔다.

1980년 5월에 국가대표가 됐는데 그 무렵에 5.18 사태가 났다. 그래도 태릉선수촌으로 들어오라고 연락을 받았다. 짐을 챙기려고 고대 기숙사를 들어가려고 했다. 혼자 들어가기가 뭐해서 이상용이와 같이 갔다. 그런데 벌써 계엄군들이 학교 주변에 쫙 깔려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몰래 학교 담을 넘어서 짐을 갖고 나오다가 군인들한테 걸렸다. 나는 별로 안맞았는데 이상용이는 많이 맞았다. 우리한테 총을 겨누기도 했다. 사단장에게 연락이 되어서 이야기를 했더니 다행히 풀어주어서 겨우 태릉선수촌에 가게 됐다. 그렇게 살벌한 시대였지만 대표선수됐으니 기분 좋은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 1980년 아시안컵에서 북한을 이겨 떠들썩했지만 정작 경기를 많이 못뛰어서 아쉬움이 컸을 것 같다.

19살 막내로서 서러움이 컸다. 당시 대표팀 미드필더에는 조광래, 이영무, 박상인 같은 쟁쟁한 선배들이 있어서 내가 주전으로 뛰기가 쉽지 않았다. 후보 생활은 난생 처음 해봐서 굉장히 속상했다.

 

- 이듬해 1981년에는 쿠웨이트에서 열린 스페인 월드컵 예선에서 쿠웨이트에 패해 본선 진출이 좌절됐다. 그 경기에서 퇴장 당한 것도 기억할텐데.

축구하면서 퇴장은 그때 처음 당했다. 더구나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퇴장을 당했으니... 너무 어려서 경험이 적다 보니까 욱하는 성질을 못이겼다. 그때는 ‘오일 달러’ 때문에 심판의 편파 판정을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었다.

0대2로 뒤진 상태였는데 경기는 질수도 있지만 심판이 워낙 편파적으로 보니까 참을 수가 없었다. 코너킥 상황에서 이태엽 선수가 헤딩으로 골을 넣었다. 그런데 상대 골키퍼가 펀칭하러 나왔다가 아무 부딪힌 것도 없고 그냥 골이 되었는데 그걸 심판이 파울을 불었다. 이미 그 상황에서 우리 선수들 모두 흥분해 버렸다. 

엄청 화가 난 상태인데 마침 쿠웨이트의 교체 선수가 들어오면서 내 발을 팍 밟았다.  밟히는 순간에 그냥 확 열이 받아서 그 선수 머리통을 박아버렸다. 그래서 퇴장을 당했다. 나는 막 분해서 울고 있는데, 조광래 선배도 얼마나 열받았으면  “태호야, 심판이라도 한 대 때리고 나가라”고 소리쳤다. 진짜 바닥에 돌멩이라도 있었으면 한 대 패고 싶은데, 운동장에는 잔디 밖에 없으니 때릴 수도 없고.(웃음). 내가 빨리 나와야 어떻게 한번 해보기라도 하니까 감독, 코치님은 빨리 나오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울면서 걸어나왔다.

 

- 1982년에는 뉴델리 아시안게임 나갔다가 참패하는 등 그 무렵 우리 대표팀 상황이 안좋았던 것 같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가끔 옛날 일을 쭉 회상해보는데, 그때는 코칭 스태프의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김정남 감독님과 김호곤 코치님이 잘 하고 계셨는데, 축구협회에서 최은택 감독님을 총감독으로 임명했다. 최은택 선생님이 이런저런 관여를 하니까,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할 때 웃지 못할 해프닝도 많이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나는 생각하는데, 글쎄 다른 선수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1983년 프로축구 출범 첫 해 대우 소속으로 할렐루야와의 경기에서. 볼 터치하는 빨강 유니폼 선수가 이태호.
 

- 1983년 프로축구 출범하던 해에 대학 졸업하면서 바로 대우에 입단을 했다.  

나하고 연세대 다니던 정해원이 대학 4학년 되자마자 대우에서 한달에 30만원씩 장학금을 줬다.  대우에 오라고 미리 스카우트를 한거다. 

대우에 가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처음에는 썩 내키지는 않았다. 대전상고 선배들이 연세대 가서 빛을 못본 것처럼 고려대 선배들도 대우에 가서 크게 활약을 못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대우에 입단하긴 했는데 가보니 연대 출신이 8명에 고대는 나 혼자였다. 팀에서는 “태호 너가 잘 해서 고대 출신들도 대우에서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라”고 자꾸 이야기했다. 열심히 해서 이미지를 바꾼 덕분인지 그 이후에는 고대 출신들이 대우에 많이 왔다.  

 

- 프로축구 초창기에는 관중도 많고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랬다. 완전한 프로축구라 할 수는 없고, 슈퍼리그라고 이름 붙이고 프로 비스무리하게 했다.(웃음). 5~6개팀이 매주말 지방 도시를 돌아다니며 유랑극단식으로 경기했다. 토요일 게임 뛰고, 그 다음날 일요일에 또 게임 뛰고 이렇게 하는 날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힘은 들어도 인기가 워낙 좋았으니까 그래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다. 

 

- 1983년 여름에 박종환 감독이 대표팀 감독이 됐다. LA 올림픽 예선을 위해 대표팀이 소집되었는데, 5명의 고참 선수(이태호, 최순호, 박경훈, 정해원, 최인영)가 태릉선수촌을 무단 이탈했던 사건이 일어나 축구계가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1980년부터 국가대표를 10년 하면서 대표팀 감독님이 여덟번 바뀌었다. 그 정도로 툭하면 바뀌고 툭하면 바뀌고 이랬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탈락하고  박종환 감독님이 대표팀에 오셨다. 대표선수를 새로 선발하는데 멕시코 세계 청소년 4강 멤버였던 어린 선수들을 많이 데리고 들어왔다. 그런데 박종환 선생님이 사람을 좀 편애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기가 데리고 온 애들은 잘한다며 좋아하고, 기존에 있는 고참들은 조금 안좋게 보셨다. 

그때 내가 주장을 맡았는데, 아무래도 이거는 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도 아직 어린 나이라 그런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후배들을 이끌어주면서 감독님하고도 대화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박종환 감독님도 워낙 고집세고 강한 분이라 그런 대화가 안통할거라고 여겼다.  

어느날 정용환까지 포함해 고참 5명을 불러놓고 솔직히 이야기를 했다. 감독님이 지금 이런 식으로 하는데 내가 보기엔 이건 아닌 것 같다, 이렇게 말하니까 자기들도 다 그렇게 생각한대. 그래서 내가 본보기로 대한축구협회에 찾아가서 하소연할테니까 너희들은 그냥 열심히 운동해라 이렇게 말했다. 그랬더니 다른 고참들도 이구동성으로 같이 그만두겠다는 거다.

그래서 6명이 같이 그만두기로 하고, 다음날 대한축구협회를 찾아가기로 했는데 정용환이는 밤사이에 마음이 바뀌어서 남기로 했다. 할수 없이 우리 5명이 평소 해오던 생각을 종이에 적은 다음에 대한축구협회를 찾아가 대표팀 사직서를 갖다주었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한 것이 태릉선수촌 나올 때 외출증을 끊고 나와야 되는데 아무 생각없이 그냥 나오는 바람에 무단이탈이 됐다. 그게 언론에 알려지면서 큰 사건이 됐고, 얼마뒤 자격정지 3년인가 징계를 받게 됐다. 몇달뒤에 징계 해제되고 풀리긴 했지만 우리 5명이 그때 많이 힘들었다.

 

- 징계가 풀려서 싱가포르에서 열린 1984년 LA 올림픽 아시아 최종 예선에 나갔다. 사우디한테 4 : 5로 져서 탈락하고 말았는데, 난타전이 벌어졌던 그 경기를 잊지 못하는 팬들이 많다.

2 : 0으로 이기고 있다가 4 : 5로 역전패했다. 그때도 사우디 애들이 심판 로비를 하려고 엄청나게 준비했다는 소문을 많이 들었다. 정말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007 가방 여러개에다 돈넣어서 왔다는 말이 돌았다. 우리가 이기기 힘든 상황이었다.



유공을 상대로 K리그 경기에 나섰을 때(흰 유니폼).
 

- 1984년에 대우가 수퍼리그 첫 우승을 차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포지션을 미드필더에서 포워드로 바꾼게 성공했다고 들었다.

포지션 바꾼 것은 사연이 있다. 시즌 중에 편도선이 나빠져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었다. 1주일 동안 누워있는데 대우 감독님이 중간에 교체되면서 전화가 왔다. 다음주에 현대와 라이벌전이 있으니 태호 네가 뛰어야겠다는 거다. 그때 대우와 현대 경기는 자동차 라이벌전으로 불렸다. 대우에는 조광래가 있고, 현대에는 허정무가 있어서 팬들 관심도 높았다. 

내가 “지금 병원에서 일주일째 아이스크림만 먹으면서 운동도 안했는데 어떻게 뜁니까? 도저히 못뜁니다”하고 말했다. 그래도 감독님이 “미드필더가 힘들면 센터포워드를 봐라.  네가 볼 간수는 잘 하니까 30분 정도만 뛰어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할수 없이 서울에서 비행기 타고 부산 내려가서 게임에 나갔다.  알부민 주사 한 대 맞고 경기를 뛰는데, 우리팀 장외룡 선수가 허정무 선배에게 심한 반칙을 해서 퇴장을 당했다. 라이벌전이니까 10명이서 죽기살기로 뛰었고, 내가 헤딩으로 한 골 넣어서 1 : 0으로 이겼다. 약속대로 하면 30분만 뛰어야 하는데 후반전 10분 남을 때까지 뛰었다. 그 바람에 다음부터는 센터포워드로 포지션을 바꿨다. 그해에 12골인가 넣고 우승까지 했다. 

그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대우에서 센터포워드로 뛰었다. 그렇다고 내가 전형적인 스트라이커는 아니었다. 몸도 빠르지도 않고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보라고 하니까 본거다. 


-> 2편에 계속


* 인터뷰 영상 보기 : 대한민국축구, 역사를 만나다_이태호 - YouTube 


글 = 송기룡(대한축구협회)

사진 = 대한축구협회, 대우 로얄즈, 이태호 제공


1984년 차범근이 속한 바이엘 레버쿠젠과 한국대표팀 경기에서 슛을 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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