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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수시절 80] 박수덕 - 득점 감각 탁월했던 센터포워드

2022-01-19 09:06:50 741


인터뷰 중인 박수덕 원로
 

박수덕(74)은 1970년대 초반 국가대표팀의 센터포워드로 활약했다. 대표선수로 뛴 기간은 2년 남짓으로 짧았다. 하지만 A매치 36경기에서 18골을 터뜨릴 정도로 탁월한 골잡이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한 늦깎이였음에도 빼어난 득점 감각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대구에 살고 있는 박수덕 원로를 만나 선수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정식 선수로 뛰기 시작한 것은 남들보다 좀 늦었다고 들었다. 어릴 때 이야기부터 해달라.

대전에서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축구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냥 친구들하고 공차며 놀다가 학교 대항 시합이 있으면 한번씩 나가곤 했다. 그때는 다른 오락거리가 없으니까 학교 운동장에서 맨날 축구하는게 일과였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공 잘찬다는 이야기는 계속 들었다.  중학교 졸업할 무렵에 공부는 하기 싫고, 축구 선수를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대전에서 축구하면 대전상고를 최고로 쳐줄때라 직접 학교에 찾아갔다. 다행히 테스트에 합격해서 그때부터 정식 선수가 됐다. 여덟 형제중 한명쯤은 운동 선수를 해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부모님도 별로 반대가 없었다. 

 

- 포지션은 처음부터 공격수였나?

그렇다. 키가 176cm 정도였는데, 당시로서는 큰 편이어서 센터포워드를 봤다. 늦게 축구를 시작하다보니 세밀한 기술은 좀 떨어져도 어쨌든 골을 넣는데는 내가 봐도 소질이 있었다. 볼이 어디로 갈지 미리 알아채고, 재빠르게 위치 찾아서 슈팅 때리는 것을 잘했다.  왼발, 오른발, 머리 가리지 않고 골문 앞에서는 자신이 있었다.  그때 서독 선수 중에 게르트 뮬러라고, 다른 건 몰라도 골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넣은 선수가 있었는데, 아마 그런 스타일이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 선수로 치면 한창 전성기의 최용수나 박주영과 비슷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웃음).

 

- 대전상고하면 과거 축구 명문고로 유명했는데, 그 무렵 전력은 어느 정도였나.

내가 다니던 1960년대만해도 충남에서는 최고지만, 전국 무대에서는 신통치 않았다. 그때는 고등학교 팀을 실력에 따라 1부와 2부로 나눠서 시합을 했는데, 우리는 1부 하위권 팀이었다. 최강팀이었던 동북고와 붙으면 3~4골차로 졌으니까.  1970년대 후반에 이태호나 김삼수 이런 후배들이 뛸 때가 돼서야 전국 대회에서 우승도 하고 그랬지. 



축구 전문지 <월간축구> 1971년 9월호 표지 얼굴로 나왔을 때
 

- 고교 졸업후에는 경희대에 입학한 걸로 알고 있다

사실은 바로 대학을 간게 아니고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녔다. 흔히 하는 말로 한해 ‘꿇었다’. 대전상고에서는 제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유명 대학으로부터 스카우트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대신고에 가서 1년을 더 뛰었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그때는 선수 등록 관리가 허술하던 때라 유급을 하거나 다른 학교에 가서 한두해 더 뛰는 운동 선수들이 다반사였다.  우상권 선생님이라고 국가대표 출신에 나중에 대표팀 코치까지 하신 분이 그때 대신고 감독님이었다. 그분한테서 좋은 지도를 많이 받고, 실력도 늘어서 다음해 경희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 당시 기사를 검색해보면 경희대에서 득점상도 자주 받은 걸로 나와 있다.

운좋게 1학년때부터 주전이 되어서 경기를 계속 뛰다보니 골 넣을 기회가 많이 왔다. 대학 대회 득점왕도 몇번 했고, 약팀하고 경기할 때는 7골까지 넣어본 적이 있다. 3학년 때는 1년에 한 50골은 넣었던 것 같다. 효창운동장에 경기하러 가면 정문의 경비 아저씨가 내가 골잡이라는 걸 알고 “어이, 수덕이! 오늘은 몇골 넣을거야?” 이렇게 늘 묻는다. 그러면 내가 싱긋 웃으며 손가락 세개 펴보이곤 했다. 그런뒤에 실제 경기에서 3골 넣은 적도 있었다.

나중에 유명 선수가 된 이영무가 그때 같은 재단인 경희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우리가 훈련하고 있으면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서 자주 구경을 했다. 연습 끝나니까 나한테 오더니 “아저씨, 어떻게 하면 골을 그렇게 잘 넣을 수가 있어요?”하면서 물어보던 기억이 난다. 

 

- 드디어 경희대 4학년이던 1970년에 대표팀에 발탁됐다

당시 대표팀 사령탑이 한홍기 감독님이셨는데, 대학 대회에서 MVP도 받고 하니까 기량을 좋게 봐주셨던 것 같다.  1970년 겨울에 태국 킹스컵 대회와 방콕 아시안게임이 잇따라 열렸다. 두 대회를 다 소화하려면 선수층이 두터워야 한다며 신인 선수들을 몇명 뽑았다. 그 덕분에 국가대표로 데뷔할 수 있었다. 촌놈이 남들보다 늦게 축구 시작해 몇년 안돼서 대표선수가 됐으니 황송할 지경이었다. 

운이 따랐는지 킹스컵 총 6경기에서 혼자 5골을 넣었다. 대표팀에 처음 뽑힌 선수가 최다골을 넣으니 신문, 방송에서 ‘대형 스트라이커’가 나타났다며 뉴스에 크게 나오기도 했다.

 


1971년 던디 유나이티드 클럽(스코틀랜드) 방한 경기에서
 

-방금 이야기한 킹스컵에서는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려 우승한 걸로 기록돼 있다.

맞다. 홈팀 태국하고 결승에서 만났는데 문전 혼전 중에 내가 골을 넣어서 1-0으로 이겼다. 재미있었던 건, 우승하고 나니까 그날밤 방콕에 있는 우리 대사관에서 선수단과 취재온 기자들을 초청해 불고기 파티를 열었다. 그런데 기자들이 오자마자 전부 박이천 선배에게 다가가 결승골 넣은 소감을 묻는게 아닌가. 왜냐하면 혼전 중에 골이 들어갔는데 누가 넣은 것인지 밖에서는 잘 안보였던 모양이다.  라디오 중계방송하던 아나운서는 이회택이 넣었다고 중계를 했고, 현장 기자들은 박이천이 넣은게 맞다며 ‘박이천 결승골’로 제목 달아서 한국으로 급히 기사를 보냈다는 것이다. 기자들 질문을 받은 박이천 선배가 “내가 골 안넣었는데요. 수덕이가 넣었어요” 이러니까 갑자기 기자들이 전부 대사관 사무실로 부리나케 내려가 자기네 신문사로 국제전화해서 득점 선수 고쳐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시간이 늦었는지 다음날 조간신문에 어떤 신문은 박이천, 어떤 신문은 라디오 중계듣고 이회택이 골 넣은 걸로 나왔다. 석간 신문들은 내가 넣은 걸로 정정이 됐다고 하더라.   
  

- 그해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도 버마와 공동우승을 하고, 다음해인 1971년에는 대표팀의 남미 전지훈련이 있었다. 당시 청룡(국가대표 1진의 별칭) 멤버들은 남미 훈련의 추억을 많이들 이야기하던데.

원래 힘든게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웃음). 서울에서 브라질 도착할 때까지 40시간은 걸린 것 같다. 제아무리 혈기왕성한 축구선수라도 그 정도면 완전히 녹초가 되는거지.  현지의 2부나 3부 클럽팀하고 붙고, 청소년팀과도 경기했는데 우리가 제대로 이기질 못했다. 확실히 수준차이를 느꼈다.  

어느날은 호텔에서 동네 공터를 내려다 보는데 중학생쯤 될법한 아이들이 볼을 주고 받으며 리프팅을 하는데 한번에 6~70개를 하더라. 우리는 대표선수라도 30개 정도 하는 수준이었는데.... 어느 경기에서 지고 나니까 회택이 형(이회택)이 그러더라. “야, 이제는 누가 물어보면 우리는 한국의 축구 대표선수라고 하지말고, 그냥 테니스 선수라고 하자” 

 

- 1971년 가을 서울에서 열린 뮌헨 올림픽 예선 일본전에서 2-1로 이길 때 선제골을 넣어 승리에 기여했다. 한일전에서 터뜨린 골은 남달랐을 것 같다.

일본을 만나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다른 나라와 경기할 때는 70분에서 80분 넘어가면 숨이 차고 피로를 느끼지만, 한일전에서는 이상하리만치 그런게 없었다. 선취골을 넣고 나니까 동료들이 모두 달려들어 나를 껴안았다. 다들 눈물이 글썽글썽해 나를 꽉 안아주는 순간, 휘감은 그 팔뚝에 힘줄이 느껴지고 무언가 울컥한 것이 가슴으로 전해졌다. 한일전을 뛴 것은 그 경기가 처음이었는데 이런 느낌인가 싶었다. 동대문운동장을 가득 채운 3만 관중의 그 열기와 환호성을 지금도 잊을수 없다.   

 


1971년 뮌헨 올림픽 아시아 예선 대만과의 경기때 슈팅을 성공시키는 박수덕(가운데)
 

- 하지만 어이없게도 말레이시아에 져서 뮌헨 올림픽 진출이 좌절됐다. 선수들의 충격도 컸을텐데.

그날 우리가 슈팅을 28개인가 그 정도 때렸는데 한골도 못넣었다. 말레이시아는 딱 한번 찬스 생겼을 때 그걸 넣었고. 경기 끝나고는 완전히 초상집이었지 뭐. 대회 끝나고 선수들 몇명과 함께 밤에 명동에 나가 술을 진탕 먹었다. 대표선수니까 다들 얼굴이 알려져 있을 때다. 술집에서 이걸 본 사람들이 그 다음날 축구협회로 엄청나게 항의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태극마크 단 놈들이 정신 상태가 썩어빠졌다면서.  며칠뒤 협회 임원 한분이 우리를 불러서 갔더니 “너희도 스트레스가 오죽 했겠나. 술먹는 것까지는 이해하는데, 사람들 안보는데서 좀 먹으면 안되겠나?” 이러면서 타일렀다.  죽도록 혼날걸로 예상하고 갔는데, 그럽게 부드럽게 말을 해주시니 오히려 더 미안했다.
 

- 그 무렵 대표선수들은 인기가 좋아서 TV 오락프로그램에도 자주 나갔다고 들었다.

자주는 아니고 나는 딱 두번 나갔다. <유쾌한 청백전>이라고 MBC에서 하는 쇼프로그램인데, 아주 인기가 좋았다.  사회를 보던 변웅전 아나운서가 충남 분이라 평소 안면도 있고해서 호기심 삼아 출연했다. 운동만 하던 사람이 그런 방송에 나가니 좀 어색하긴 했는데, 같이 출연한 연예인들이 웃기는 이야기도 하면서 많이 도와주었다. 방송 나간 다음날 시내에 나가니까 사람들이 알아보고 싸인도 해달라고 해서 어깨가 좀 으쓱해졌지(웃음).   

 

- 1972년 봄에 아시안컵에 나가서는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다. 요즘에는 아시안컵이 메이저 대회로 위상이 높은데,  당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때는 ‘아시안컵’이 아니라 ‘아시아 선수권대회’라고 불렀다. 솔직히 무슨 대회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나갔다. 당시에 제일 중요한 대회는 월드컵 예선과 올림픽 예선, 아시안게임이고, 그 다음이 메르데카, 킹스컵, 박스컵 같은 대회였다.  아시아 선수권은 4년마다 하니까 사람들이 거의 기억도 못하고, 언론에서도 별로 크게 다루질 않았다. 결승에서 이란과 맞붙어서 졌는데 유럽 선수처럼 덩치도 큰데다 실력에서도 우리가 밀렸다고 봐야할 것 같다. 



1971년 뮌헨 올림픽 아시아 예선 말레이시아전에서 헤더를 시도하는 모습(오른쪽)

 

- 태국에서 열린 그 아시안컵은 차범근이 대표팀 A매치 데뷔를 한 대회로 유명하다.

그랬었지. 범근이 이야기 하니까 생각나는데, 어디하고 했던 경기였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내가 골문 앞에서 범근이한테 밀어줘서 결정적인 찬스가 생겼다. 살짝 갖다대기만 하면 들어가는건데, 범근이가 그만 너무 세게 차는 바람에 공중으로 떠서 날아가 버렸다.  전반 끝나고 라커룸에서 세연이 형(이세연 골키퍼)이 범근이를 보더니 “야, 범근아. 너 축구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겠더라”하고 말했다. 새까만 후배에게 그냥 농담반 진담반으로 한마디 던진건데, 범근이가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줄 몰라하던게 기억난다. 덩치만 컸지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제 막 대표팀에 들어온 순진한 애가 하늘같은 선배한테서 그런 말을 들었으니 아마 그날 정신이 없었을거다(웃음). 나이도 어리고 미숙한 점이 많았지만, 체격좋고 스피드가 있어서 그후에도 감독님들이 차범근을 계속 기용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시점이 되니까 완전히 물이 오르더라. 역시 선수는 꾸준히 뛰어야 실력이 늘고, 어린 선수일수록 특히 그렇다. 


- 그해(1972년) 여름 메르데카 대회에서 우승컵을 차지해 축구계 전체의 사기가 다시 올라갔다. 

나하고 박이천, 차범근이 주로 공격을 맡았는데 호흡이 잘 맞았다. 수비는 김호 선배가 중심을 잡아주었고, 미드필드는 고재욱이 한창 좋을 때였다. 결승전에서 홈팀 말레이시아와 붙었다. 1년전 올림픽 예선에서 우리를 떨어뜨렸던 팀이라 무조건 이겨서 복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수중전에 약하다고 봤는지 말레이시아 측에서 잔디에 물을 많이 뿌린 것 같았다. 그때 말레이시아 수비의 핵심이 찬드란과 소친온이었다. 준결승 일본전에서 내가 두골을 넣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두명이 나한테 바짝 달라붙어 밀착 수비를 했다.  전반전 끝나기 직전에 찬드란이 나를 마크한다고 달려들다가 미끄러져서 그만 헤딩 자책골을 넣고 말았다.  운동장에 물을 많이 뿌린 것이 오히려 자기네들에게 독이 된거다. 후반 시작해서도 나에게 수비가 쏠린 틈을 타서 범근이가 하프라인에서부터 30~40미터쯤을 단독 드리블로 치고 들어가 통쾌한 슛을 성공시켰다. 결국 2-1로 이기고 우승했다. 김포공항에서 성대하게 환영 행사도 하고, 장덕진 축구협회장님이 포상금도 두둑하게 주셨다.  진짜 축구할 맛이 났지.

 

- 그 무렵 대표팀 주장을 맡았던 김정남 선수와 권투로 한판 붙었던 이야기가 유명하던데, 들려달라

그걸 어떻게 알았나?(웃음). 1971년쯤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날 이세연 선배가 오더니 “수덕아, 정남이 형이 너하고 권투 시합 한판 붙고 싶다고 하던데, 넌 어떠냐?”하고 묻더라. 나는 “에이, 어떻게 선배님하고 권투를 해요? 안할래요.”했는데, 몇번을 끈질기게 졸랐다. 할수 없이 “정 그렇다면 재미로 한번 하죠”하고 승낙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김정남 선배가 나의 행동에 대해 못마땅한 것이 있어서 한번 쥐어박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없겠냐고 이세연 선배에게 물었고, 세연이 형이 권투 시합해서 때려주면 된다고 꼬드긴 모양이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이 형들이 왜 이럴까 하면서 태릉선수촌 안에 있는 복싱장으로 갔다. 사실은 내가 고등학교 때 호기심에 복싱을 잠깐 배운적이 있어서 은근히 자신은 있었다. 그렇지만 선배랑 붙는 거니까 살살 피하면서 대충 시간만 때울 심산이었다. 세연이 형이 심판을 보는 가운데 2분 2회전으로 약속하고 링에 올라갔다. 정남이 형은 ‘옳지 됐다’ 싶었는지 나를 때리려고 엄청나게 주먹을 휘둘렀다. 내가 요리조리 피하니까 더 열받아서 씩씩거리며 펀치를 날렸다.  나도 피하기만 할 수는 없어서 한두대 맞고 나서는 곧바로 반격을 했다. 정남이 형 얼굴과 배에 정통으로 몇대를 때렸다. 그러자 정남이 형이 바로 고꾸라지더니 “야, 그만 할래. 됐어” 이러면서 도망치듯이 복싱장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 소문을 들은 대표팀 형들이 모두 나만 보면 씨익 웃으면서 몰래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공 잘차고 인물도 좋아서 여자팬들에게 인기 높은 정남이 형에게 은근히 질투하는 마음들이 있었는데, 내가 그렇게 때려주니 다들 고마웠던 모양이다(웃음).      

 


1972년 대표팀 A매치에서 국민의례를 하는 모습. 왼쪽부터 김경중, 박수덕, 고재욱, 박이천 선수.
 

- 1972년까지 잘 나가다가 다음해부터는 대표팀에서 제외됐다. 무슨 일이 있었나?

특별한 건 없고 그냥 주전 경쟁에서 밀린거지 뭐.  1973년에 월드컵 예선 앞두고 민병대 감독님이 새로 부임했는데, 소속팀 주택은행에서 데리고 있던 장신 공격수 김재한을 대표팀 포워드로 뽑았다. 김재한 중심으로 공격진을 구성하면서 내가 설 자리가 없어진 거다. 동남아 선수들하고 할때는 김재한을 포스트에 박아놓고 하는 작전이 잘 먹혀들어가니까, 나는 뒷전으로 밀린거지.  운명인가보다 하고 미련없이 받아들였다.    
 

- 1975년에는 홍콩으로 건너가 세이코 팀에서 1년간 활약하도 했다

기업은행에서 뛰고 있을 때인데 득점왕도 하고 몸이 괜찮았다. 당시에 홍콩 세미 프로팀들이 한국 선수들을 높게 평가하던 시기라 나에게도 제안이 왔다. 우리 실업팀들보다 월급을 2~3배 더 주기는 했지만,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바람 좀 쐬고 오겠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갔다.  우리보다 실력은 떨어져도 관중도 많고 그런대로 환경도 괜찮았다. 그러나 1년 정도 뛰다보니 한국 생각도 나고 해서 다시 돌아왔다. 나하고 같은 시기에 홍콩에 갔다가 아예 정착해서 지금도 거기 살고 있는 변호영 선배같은 사람보면 대단한 거다.

 

- 1976년에 갑자기 선수 은퇴를 했다. 28살이었는데 조금 이른것 아닌가?

그 당시 기준으로 보면 그렇지도 않다. 선수로 성공하기 힘들 것 같으면 빨리 은퇴하고 소속팀인 은행에서 실무 익히는게 더 낫다고 많이들 생각했으니까.  

1976년 여름에 홍콩에서 돌아왔는데, 그때 포항제철에서 뛰던 이회택 선배가 갈데 없으면 포항제철로 오라고 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대구에 사는 처남이 놀러오라고 했다. 갔더니 대구 협성상고에 감독 자리가 비어있는데, 나보고 해볼 생각 없느냐고 물었다. 나만 OK하면 바로 자리준다고 학교측에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지도자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아서 잠깐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 더운 여름에 다시 포항제철 팀에 가서 훈련을 할 생각을 하니 도저히 자신이 없고 암담했다. 그래서 처남에게 협성상고 감독하겠다고 수락했다. 대구의 찜통 더위가 나를 빨리 은퇴하게 만든 거다(웃음) 

 


1972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1회 한일 정기전에서 드리블하는 박수덕 


- 협성상고, 청구고 감독을 거쳐서 영남대 감독까지 한 걸로 알고 있다.

협성상고에서 5년, 청구고에서 5년을 있었다. 1984년에 청구고 감독할 때는 3개 대회에 나가서 한번도 안지고 모두 이겨서 우승을 했다. 아마 우리나라 고교축구 역사에 그런 기록은 없을 것 같다. 그 다음해 봄 대회에서도 또 우승을 했으니까 실질적으로 4개 대회 연속 우승이다. 박창현, 이수철, 김동해 이런 선수들이 잘했다.

영남대 감독하던 1991년에는 대통령배전국축구대회에서 우승했는데, 영남대가 전국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2005년에 영남대에서 퇴직하면서 완전히 은퇴했으니 감독 생활만 30년을 했다. 
 

- 감독 시절 키운 제자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정정용과 신태용인 것 같다.

정용이는 청구고 감독할 때 데리고 있었다. 축구 실력이 아주 특출난 것은 아니었지만 착하고 성실하고 리더십이 있는, 정말 인성이 좋은 친구였다. 대학 졸업반일때 진로 문제가 잘 안풀렸는지 어머니와 함께 우리집에 찾아온 게 기억난다. 자질이 아까워서 내가 이곳저곳 알아보다가 이랜드 감독하던 이영무와 연락이 닿아서 추천했더니, 일단 테스트를 해볼테니까 보내라고 했다.  다행히 잘돼서 그후로 이랜드에서 몇년간 뛰었다.  정용이가 청소년 대표팀 맡아서 U-20 월드컵에서 준우승할 때는 내가 감독인 것마냥 기뻤다. 제자가 선수로 성공한 것도 보람있지만, 지도자로 성공해서 칭찬받는 걸 보는 것도 참 감개무량한 일이다. 

신태용이는 영남대 감독할 때 같이 있었다. 볼도 예쁘게 잘차고 영리했다. 보통은 선수가 아무리 잘해도 오래 생활하다보면 한번씩 감독한테 혼나는 일이 생긴다. 그러나 태용이는 눈치가 빨라서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태용이 활약 덕분에 전국 대회 우승도 하고, 하여튼 그 놈 덕을 많이 봤다. 


- 축구 인생을 돌이켜 볼 때 후회되는 것이나 소감이 있다면.

대표선수로 뛴 기간이 조금 짧았던 것 외에는 특별히 후회하거나 아쉬움은 없다. 이회택 선배가 대표팀 감독할 때 나보고 코치로 와달라고 연락온 적이 있는데 사양했다. 회택이 형은 ‘희한한 놈’이라고 했지만, 대표팀 코칭 스태프로 있다가는 스트레스로 오래 못살 것 같아서(웃음).  큰 욕심 안내고 소박하게 사는게 결과적으로 더 좋았고 나에게 맞더라. 

우리나라에서 처음 거국적으로 축구붐이 일어날 때가 1970년대 초반이었다. 그 시절에 대표선수로서 나름대로 기여를 했다는데 자부심을 느낀다.  축구에 대한 국민들의 열기와 관심도는 그때가 정말 대단했다. 그런 과정들이 쌓이고 쌓여서 오늘의 한국 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글 = 송기룡(KFA)
 


1972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메르데카 축구대회 우승후 기념촬영하는 선수단. 뒷줄 왼쪽에서 여섯번째 태극기 아래가 박수덕. 앞줄 트로피 든 선수가 김호곤, 오른쪽 끝이 차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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