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TV협회일반

[나의 선수시절 78] 김진국 - 빼어난 발재간으로 사랑받았던 최단신 공격수

2021-08-30 17:22:44 2,048


인터뷰 중인 김진국
 

김진국(70)은 1970년대 중반 한국대표팀의 붙박이 공격수였다. 키 165cm에 몸무게 60kg. 역대 축구 대표선수 중 가장 키가 작았던 그는 작달만한 체구로 인해 ‘짤만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뛰어난 발재간과 페인팅 동작으로 그 시절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한 선수였다. 1972년부터 1977년까지 6년 동안 A매치 97경기에서 27골을 넣으며 대표팀의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일흔이 된 지금도 어린이 축구교실을 운영하며 축구공과 함께 사는 김진국 원로를 만나 보았다. 

 

-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해달라. 

경기도 화성 시골에서 4남 2녀 중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정식 선수는 아니었고 반 대항이나 학교 대항 축구 경기가 있으면 나가서 뛰고 했다.  공 차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밥 먹는 것도 잊고 하루 종일 또래들과 뛰어다녔다. 

수원북중학교에 진학해서 정식 선수가 됐다. 센터포워드를 맡았는데 곧잘 한다고 소문이 났는지, 서울 경신고에 있던 선배들 눈에 띄어서 경신고로 가게 됐다. 

 

- 경기도 화성하면 차범근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그렇다. 범근이 집하고 우리 집하고 10리(4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물론 그때는 몰랐고 나중에 범근이가 경신고 후배로 들어와서 알게 됐다. 

 

- 차범근이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쓴 글에, 김진국 선배가 유니폼과 트레이닝복 입고 다니는 게 멋있고 부러워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다는 것을 본 게 기억난다.

내가 2년 선배인데, 시골 중학교 다니던 범근이 눈에는 서울에서 축구로 유명한 고등학교에서 선수로 뛴다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다(웃음)
 


경신고 재학 시절 김진국(왼쪽)과 장운수 감독
 

- 경신고에 입학해서부터 숙소 생활을 시작했나?

아니다. 1학년 때까지는 숙소가 좁고 시설이 안 좋아서 서울까지 통학을 했다. 수원 누나 집에서 살면서 수원역에서 기차타고 서울역까지 와서, 다시 버스타고 혜화동에 있는 경신고등학교까지 갔다. 두 시간이 더 걸렸다. 새벽 5시쯤 집을 나와, 저녁에 야간훈련 끝나고 집에 가면 밤 11시가 넘었다. 이런 생활을 1년 넘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걸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아마 요즘 선수들은 절대 그렇게 못하지 싶다. 축구가 좋아서, 대표선수 되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던 것 같다.

 

- 키가 작아서 핸디캡이 많았을 것 같다.

고민을 많이 했지만, 고2, 3이 되어도 더 이상 자라지 않는걸 알고는 포기했다.  그때 경신고 감독님이 장운수 선생님이었는데,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다. 나중에 대우 로얄즈 감독까지 하셨다. 장 감독님이 축구는 키가 작아도 얼마든지 기술로 커버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셨다. 그 말을 새겨서 정말 아침부터 밤까지 오로지 기술 연마에 모든 시간을 바쳤다. 텅 빈 학교 운동장에 혼자 남아 달빛아래 훈련도 많이 했다. 나중에 지도자들이나 팬들로부터 볼 다루는 기술이 좋다는 평을 많이 들었는데, 그때 열심히 훈련한 덕분인 것 같다. 

 

- 왼발을 잘 써서 주로 왼쪽 사이드 공격을 담당했던 걸로 기억한다.

원래는 오른발잡이였는데, 축구 선수라면 양발이 다 능숙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왼발로 공 다루는 연습을 엄청나게 했다. 연습 때나 시합 때도 일부러 왼발을 많이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이 되니까 왼발이 더 편해지고 정확해졌다. 그래서 오른발은 강하게 차거나 멀리 찰 때 쓰고, 왼발은 정확한 킥이나 드리블할 때 썼다.

 

- 1969년 고3때 청소년대표팀 예비명단에 뽑힌 걸로 기록이 나온 걸 보면 실력을 인정받았던 모양이다.

3학년 되어서 경신고 주장을 맡았는데, 전국 대회에서 우승도 하고 성적이 좋으니까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예비 명단에는 뽑혔지만 최종 멤버에는 떨어져서 1970년 아시아 U-20 청소년 대회에는 못나갔다. 다른 선수들보다는 한 살 어렸지만, 그래도 좌절을 많이 했고 상실감이 굉장히 컸다. 다행히 정신적으로 잘 회복이 되어서 그 다음해(1971년) 아시아 청소년대회에는 출전할 수 있었다.   

 

- 말씀하신 1971년 아시아 청소년대회는 일본에서 열렸는데 준우승을 차지했다. 처음 나간 국제대회였는데 어땠나.

훈련도 많이 한데다, 가까운 일본에서 하니까 다들 컨디션이 좋았다. 차범근, 김호곤, 황재만 등 나중에 대표선수 되었던 멤버들이 많아 기량도 괜찮았다. 준결승에서 일본을 승부차기로 꺾고 결승전에 나갔는데, 이스라엘을 만나 0-1로 졌다. 아무래도 이스라엘은 아시아권 선수들하고는 덩치부터 달라서 조금 힘들었다. 

개인적으로는 골도 많이 넣고 국제무대에서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 후에 대표선수 되어서 일본을 자주 갈 기회가 있었는데, 일본 관계자들이 청소년 대표 시절 활약을 기억하더라.



1973년 박스컵 축구대회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돌파하는 김진국
 

- 경신고 졸업 후에 대학을 안가고 기업은행에 입단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대학을 가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장운수 감독님이 새로 창단된 기업은행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 시절엔 스승님 말씀이 하늘같았으니까.  감독님이 나를 위해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주었는데 거역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찍 실업무대에 뛰면서 실력도 많이 늘고 대표팀에도 뽑혔으니 결과적으로 잘된 것 같다.   

 

- 1972년 봄에 국가대표팀에 처음 뽑혀서 1977년까지 맹활약했다.

1971년에 대표팀이 뮌헨 올림픽 예선에서 탈락하면서 세대교체 바람이 있었다. 그 덕분인지 스물한살 되던 1972년 봄에 꿈에도 그리던 A대표팀 유니폼을 입게 됐다. 처음 몇경기는 후보로 있다가, 여름에 있었던 메르데카배 대회 때부터 조금씩 기용되면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78년 대표팀에서 물러날 때까지 6~7년 동안 A매치를 100경기 가까이 뛰었으니 쉴틈없이 원 없이 뛰었다. 물론 월드컵, 올림픽 본선에 한 번도 못나간 것은 원통하지만. 그때는 아시아, 오세아니아 합쳐서 티켓이 1장뿐이라 정말 어려웠다. 

 

- 기록을 보니 1975년 3월부터 1977년 2월까지 A매치 42경기 연속 출전을 했다.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요즘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웃음). 그때는 한번 베스트11이 정해지면 웬만하면 잘 안 바꾸던 시절이니까. 선수층도 지금보다는 두텁지 않을 때고. 그렇지만 반대로 한번 삐긋해서 주전 자리 뺏기면 다시 찾기도 어려우니, 마음을 못 놓고 더 이 악물고 했던 것 같다. 잔부상은 있었지만 큰 부상을 당하지 않은 것을 보면 운이 좋았다.

 


축구 잡지 <월간축구> 1976년 4월호 표지를 장식한 김진국
 

- 대표팀 경기에서 차범근이 오른쪽 측면을 질풍같이 내달려 슈팅을 하거나, 김진국이 왼쪽 사이드에서 상대 수비를 요리조리 따돌린 다음에 센터포워드였던 장신 김재한에게 크로스를 올려서 득점하는 장면은 올드팬들에게 진한 향수로 남아있다. 

내가 대표선수 중에 제일 키가 작았고, 김재한 선배는 190cm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장신이라 사람들이 비교하면서 재미있어 했던 것 같다. 보통 센터링(* 과거에는 크로스를 센터링이라고 했다)이라고 하면 낮고 빠르게 올리는 것이 위협적이지만 재한이 형에게 올리는 센터링은 달랐다. 재한이 형이 키는 컸어도 빠르지 않으니까 공을 아주 높고 느리게 보내야 헤딩을 따낸다. 그래서 ‘김재한용 센터링’이라고 불렀다.(웃음)  

 

- ‘접기’하면 요즘 축구팬들은 설기현이나 문선민을 많이 떠올리겠지만, 1970년대에는 김진국이 최고의 ‘접기왕’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몸집이 작아서 상대 수비를 따돌리려면 페인팅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조그만한 선수가 그런 속임 동작으로 덩치 큰 선수를 제치는 것을 팬들은 좋아했던 것 같다. 자랑 같지만 그 무렵 한동안 KBS에서 스포츠 중계방송 시작할 때는 내가 공을 이리저리 접으면서 상대 선수 따돌리는 장면을 오프닝 영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 가장 잊지못할 경기나 기억나는 골이 있다면.

박스컵, 메르데카, 킹스컵 이런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경기들이 생각난다. 반면에 1977년에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 이스라엘 원정 경기는 아쉬움이 너무 커서 잊지 못한다.  0-0으로 비기고 있을 때 후반전에 내가 쏜 슛이 크로스바 맞고 골라인 안으로 분명히 떨어졌는데, 심판이 노골 선언해서 0-0 무승부로 끝났다. 그때 축구협회에서 FIFA에 항의도 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한번 판정 난 것을 되돌릴 수가 있나. 지금처럼 VAR이라도 있었으면 골로 인정받았을 거다. 

우리 때는 한일전이 정말 중요했는데 1976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올림픽 예선 일본전에서 내가 선제골을 넣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1977년 한일정기전 때는 헤딩으로 골을 넣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지. 



대표팀 콤비였던 김재한(왼쪽)과 함께.
  


1972년 메르데카컵 우승후 김포공항 환영식에서. 오른쪽이 김진국. 왼쪽으로 이회택, 김재한의 얼굴이 보인다.


1976년 박스컵 대회 말레이시아전에서 슈팅하는 김진국. 건너편 선수는 차범근.
 

- 여담이지만, 옛날에는 대표선수들도 소집되면 직접 손으로 유니폼 빨래를 했다는데 사실인가.

그랬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태릉선수촌에 세탁기가 없어서 선수들이 직접 했다. 자기 것만 하면 그래도 괜찮은데 신참들은 선배들 빨래까지 도맡아 해야 해서 힘들었다. 물론 이영무처럼 “어릴 적 나의 우상 이회택 선배의 유니폼을 빨래하는 건 영광”이라고 한 녀석도 있었다(웃음).  

지급되는 유니폼도 몇벌 안돼서 계속 빨아 입어야 했다. 요즘에는 국제경기 끝나면 상대 선수와 유니폼 교환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때는 그랬다간 난리난다.  훈련도 잔디운동장에서는 거의 못하다가 어쩌다 육사구장이나 기업체 공장 안에 잔디운동장이 있으면 빌려서 했다. 그 무렵엔 서울 뚝섬 경마장 옆에 골프장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자주 했다. 한참 훈련하고 있는데 골프공이 날라와서 피하기도 하고, 어떤 선수는 몸에 맞아 고생한 적도 있다. 

 

- 1978년에 대표팀에서 물러났다.

그해 메르데카 대회까지는 참가했는데, 몸도 안 좋고 그래서 경기를 못 뛰었다. 실력 좋은 후배들도 치고 올라오는 상황이라 이제는 자리를 내줘야 될 때라고 생각했다. 나이는 늦었지만 그때 건국대에 입학해서 뛰고 있어서 소속팀에만 충실하자며 마음을 비웠다.

   

- 1980년에 서독 2부리그 다름슈타트 팀에 입단해서 차범근에 이어 한국선수 유럽 진출 2호가 됐는데.

이미 대표팀에서도 나온 상태였기 때문에 선수로서 유럽무대에서 성공해 보겠다고 간 건 아니었다. 그냥 견문을 넓히는 차원에서 도전한 거다. 그때 서독이 축구로는 최고 선진국이라 직접 가서 배우고 싶었다. 그냥 구경하는 것보다는 선수로 뛰면서 체험하면 더 좋을 것 같아 시도했는데 다행히 계약이 돼서 입단했다. 범근이 때문에 한국 선수에 대한 호감이 있을 때였으니까.

1980년 1월부터 다름슈타트에서 6개월 뛰고, 여름에 같은 2부리그에 있던 보름스(Worms) 팀으로 옮겨서 1982년 시즌까지 두 시즌을 뛰었다. 

 

- 서독에서 경기는 많이 출전했나? 차범근과도 자주 어울렸을 것 같은데.

다름슈타트 갔을 때는 후반기였고 적응하느라 몇 경기 못 뛰었다. 보름스로 옮기고 난 뒤에는 두 시즌 합쳐서 30경기 정도 출전했던 것 같다.  가난한 중하위권 팀이라 성적이 썩 좋지는 않았다. 

범근이하고는 두세 번 반갑게 만나기는 했지만 자주 보지는 않았다. 알다시피 그때 범근이가 선수 생활에 충실하기 위해서 외부 사람들 만나는 걸 자제하던 시절이었다. 나도 그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일부러 찾지 않았다.  

 

- 국내로 돌아온 건 언제였나.

1982년 보름스 나온 다음에 쾰른 체육대학에서 6개월간 지도자 코스 공부를 했다. 1983년 우리나라에 프로축구가 출범했는데 국민은행도 참가했다. 국민은행에서 선수 겸 코치로 와달라고 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선수로도 몇 경기 뛰었다. 그 후에 1992년까지 국민은행에서 코치, 감독 생활을 했다. 김학범 감독이 그때 우리 팀에서 선수로 뛰었지. 1993년부터 일반 은행원으로 전환해 근무했고 지점장까지 하고 나왔다. 선수로 유명하다 보니 나를 아는 고객들이 은행 실적 올리는데 많이 도움을 줬다(웃음).
 


1977년 열린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 이스라엘전에 출전한 대표팀. 맨왼쪽이 김진국. 그 옆으로 김황호 골키퍼, 차범근, 조영증, 박성화, 허정무도 보인다.


김호곤이 경기에 못뛸 때는 김진국이 주장을 맡았다. 일본 대표팀 주장 가마모토와 악수하는 김진국.
 

- 2001년부터 2011년까지 KFA 임원으로도 일했는데. 

과분하게도 유소년위원장, 기술위원장, 기획실장, 전무이사까지 맡았다. 우수 유소년선수들의 해외 유학 프로젝트 책임을 맡아서 진행한 게 기억이 남는다. 손흥민을 비롯해 지동원, 남태희 이런 선수들을 발굴해 잘 성장할 있도록 도운 것에 보람을 느낀다.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초중고와 대학에 리그제를 도입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미흡한 점이 여전히 있지만 학원 축구의 토대를 바꿨다고 자부한다. 전무이사 재임 중이던 2010년에 월드컵 16강 진출하고, 여자 17세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성과를 거두었을 때도 굉장히 뿌듯했다.

직원 회계 부정 사건이 발생해 2012년 초에 물러났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에 전무이사인 내가 그만두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 요즘은 어떻게 소일하는가.

1995년부터 서울 양천구에서 <김진국 어린이 축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엘리트 선수를 키우려고 한 것은 아니고, 그냥 아이들이 공차며 신나게 노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어릴 때는 운동하면서 몸도 튼튼히 하고 사회성, 협동심을 키우는 게 좋지 않은가. 이런 뜻이 통했는지 학부모들도 좋아하고 구청, 교육청에서도 도움을 줘서 어느덧 27년째 하고 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아이들하고 공차는 시간이 제일 즐겁다.

돌이켜보면 축구하면서 좌절하고 힘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기쁘고 보람 있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지금도 식당 같은 데 가면 나이 드신 분들은 얼굴 알아보고 사진 같이 찍자고 하면서 반갑게 대해줄 때마다 축구 인생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글=송기룡(KFA)

사진=대한축구협회, 김진국,  스포츠서울 제공

  • 페이스북
  • 트위터
  • URL 카피

FIFA와 e스포츠의 필연적 만남

폭우에도 멈추지 않았던 여자축구 미래를 위한 열정

목록
이전게시글 다음게시글

협회일반

박윤정 전임지도자, AFC 여자 축구 발전 캠페인 참여

협회일반

정몽규 회장, 내년 3월까지 동아시아축구연맹 이끈다

협회일반

‘올해의 선수’는 손흥민, 지소연...양민혁, 김신지는 ‘영플레이어’상

협회일반

대한민국 축구계, 산불피해 지역민 돕기 위한 성금 기부

협회일반

대한체육회, 제55대 대한축구협회 정몽규 회장 인준 승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