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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세한 장덕진 전 축구협회장, 열정과 추진력 갖춘 선각자

등록일 : 2017.04.21 조회수 : 5901
1970년 메르데카배 축구대회 우승 후 귀국 카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20일 향년 83세로 별세한 장덕진 전 대한축구협회장은 역대 축구협회장 중 가장 열정적이고 패기넘치게 일했던 사람 중의 한명으로 손꼽힌다.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춘천고와 고려대를 졸업한 그는 일찍이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에 모두 합격하며 천재소리를 듣던 인재였다. 재무부 고위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장덕진은 1969년 대한축구협회 재무이사에 위촉된 것을 계기로 축구 행정을 시작했다. 평소 재무부 내 축구동호인 대회를 창설할 정도로 축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소문나면서 축구협회가 손을 내민 것이다.

대한축구협회 재무이사가 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실업 축구팀을 창단하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제일모직, 대한중석, 금성방직 정도가 실업팀의 전부여서 선수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선수 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재무부 관료로 재직하면서 알게된 시중 은행장들을 상대로 일일이 설득에 나선 장덕진의 추진력 덕분에 1969년 한해에만 은행 축구팀이 7개나 생겼다.

1970년 1월 대한축구협회장에 추대된 이후에도 은행팀 창단은 계속돼, 그가 재임한 1973년까지 모두 13개의 금융단 축구팀이 만들어졌다. 은행팀들만 참가하는 자체 리그 대회를 개최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실업팀이 많지 않아 선수 육성에 애로가 많았던 다른 종목 단체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당시 은행팀에서 선수로 뛰었던 많은 축구 원로들은 지금도 “장덕진 회장이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들을 다 먹여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선수 생활을 지속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은퇴 이후에도 은행원으로 직장을 다닐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외에도 장덕진 회장이 한 일은 굉장히 많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친분을 활용해 1970년대 축구팬들을 열광케 했던 일명 ‘박스컵’(박대통령컵 국제축구대회)을 창설한 것도 그중의 하나다.

1970년에는 국가대표팀을 1진 ‘청룡’과 2진 ‘백호’로 나눠 경쟁심을 부추김과 동시에, 두 팀이 다양한 국제대회에 참가해서 경험을 쌓도록 했다. 당시 경제형편으로서는 파격적인 청룡팀의 남미 40일 전지훈련도 실시했다. 포르투갈의 벤피카나 브라질의 산토스, 플라멩고 같은 유명 클럽팀들을 초청해 대표팀과 평가전을 갖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72년에는 한일 정기전도 출범했다. 대표팀과 청소년대표팀 선수들이 상해보험을 들수 있게한 것도 국내 스포츠 사상 처음이었다.

축구 저변과 축구붐 조성에도 앞장섰다. 어린이 축구를 장려하기 위해 학교는 물론, 시군구 단위로 어린이 축구팀을 만들도록 했는데, 1970년 첫해에만 6백여 팀이 구성됐다. 전국의 각 초등학교에 축구공 3만개 보내기 캠페인을 실시해 큰 호응을 받았다. 주말마다 전국에 28개의 어린이 축구교실을 열어 축구 기술을 보급하도록 했다. 공모를 통해 <축구의 노래>를 제정, 주요 대회를 할 때마다 축구장에서 틀도록 하기도 했다.

1972년에는 지금의 조기축구대회에 해당하는 새마을축구대회를 시도대항전으로 처음 개최했다. 지역 단위에서부터 축구 열기가 형성되어야 대한민국 축구 전체의 인기와 수준이 올라간다는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또 대표팀의 경기 모습을 촬영한 축구 영화를 만들어 전국 순회 상영을 실시함으로써, 당시 흑백TV로는 볼수 없었던 칼라 영상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위와 같은 일들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대한축구협회가 당연히 해야 하거나 할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축구 인프라나 축구 문화가 형성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손쉽게 구상하거나 실행에 옮기기 힘든 사업이었다.

문제는 장덕진 회장의 열정과 능력을 원하는 곳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었다. 1973년 8월 정부는 그를 농수산부 차관에 임명했다. 도저히 축구협회장 직을 계속 수행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장덕진 회장은 3년 7개월만에 사임을 발표했다. 장덕진 회장이 추진했던 많은 사업들은 안타깝게도 그의 사임 이후 동력을 잃고 대부분 흐지부지됐다.

회장 재임 시절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지난 2005년 대한축구협회는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장덕진을 추천했다. 그러나 본인이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

KFA뉴스팀
사진=한국축구100년사
1972년 호주로 축구 유학을 떠나는 김정남 선수(오른쪽)를 격려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