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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 ‘족쇄맨’에서 ‘부회장’으로 변신한 최영일

등록일 : 2017.11.30 조회수 : 2575
최영일 부회장은 아마추어 축구 전반을 관장하는 중책을 맡게 됐다.
1990년대 한국 대표팀의 수비라인을 책임진 최영일(51)이 야인 생활을 끝내고 축구 행정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역 시절 일본 공격수 미우라 카즈요시의 전담 마크맨으로 ‘족쇄맨’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그는 지도자를 거쳐 이제 그라운드 밖에서 축구를 진두지휘하게 됐다.

대한축구협회는 최근 대의원총회를 열어 새 임원진 선임과 정관 개정안을 의결했다. 김호곤 기술위원장(부회장), 이용수 부회장, 안기헌 전무이사가 사임 의사를 발표함에 따라 새로 확정된 임원은 6명으로 최영일 부회장, 홍명보 전무이사, 이임생 기술발전위원장, 조덕제 대회위원장, 박지성 유스전략본부장, 전한진 사무총장이다.

최영일 부회장은 학원 및 클럽 리그 관장 및 제도개선을 담당하는 부회장으로 협회에 들어오게 됐다. 최 부회장은 11월 17일 취임 기자회견에서 “학교 지도자로 있다가 협회로 들어왔는데 아마추어 축구의 제반 문제를 풀기 위해 조병득 부회장님과 협력해 발전적인 모습을 보이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동래고-동아대를 졸업한 최 부회장은 1989년 울산현대에서 프로 데뷔해 2000년까지 현역 생활을 했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는 국가대표팀 수비수로서 55경기를 뛰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주장을 맡았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는 동아대학교 사령탑으로 부임해 2012년까지 12년간 지도했다.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던 그는 협회의 신임 임원진으로 합류했다.

지난 22일 축구회관 3층 집무실에서 최 부회장을 만났다. 최 부회장을 잘 모르는 현 세대를 위해, 그리고 그를 알지만 최근 행적을 몰랐던 이들에게 그가 살아온 인생을 소개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최 부회장의 대표팀 시절, 동아대 감독 시절, 그리고 협회 행정가로서의 미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1시간 동안 차근차근 들어봤다. 그는 때론 호탕하게 웃으며, 때론 눈물을 글썽이며 과거, 현재, 미래를 말했다.
1997년에 열린 1998 프랑스월드컵 최종예선 한일전에서 승리한 뒤 기뻐하는 최영일(맨 오른쪽)의 모습.
나의 대표팀 시절 "미우라 때문에 야쿠자의 살해 협박 받았죠"
최영일은 한국 나이로 스물아홉살에 대표팀에 데뷔했다. 그것도 주전 수비수의 부상으로 인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들어간 '대타'였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성실성으로 주전 자리를 단숨에 꿰찼다. 그리고 1997년부터는 대표팀의 주장 완장을 찼다. 특히 대표팀에서 활약하던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미우라의 전담 마크맨으로 일본 팬들에겐 공공의 적, 한국 팬들에겐 사랑받는 수비수였다.

- 한국 나이로 스물아홉살에 대표팀에 데뷔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이 열린 해에 대표팀에 합류했는데 대표팀 입성이 늦었다.
1991년에 한 번 대표팀에 갔었다.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 2진으로 뽑혔다. 그때 청룡이 1진, 백호가 2진이었는데 백호팀에 뽑혀 경기에 출전했다. 그리고 월드컵 직전에 대표팀에 합류하게 됐다. 내가 잘 못하니까 늦게 들어온 것이다.

- 겸손의 말씀이다. K리그에 1989년 데뷔하자마자 주전으로 발돋움하지 않았나.
운이 좋았다. 당시 울산 현대에 대표팀 선수가 변병주, 최강희, 최인영, 윤덕여 등 6명 정도 있었다. 그 선수들이 대표팀으로 빠져나가 내가 뛸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 첫 해부터 경기에 나갈 수 있었다. 대표팀은 당시 주전이던 정종선, 박정배 등 중앙수비수 두 명이 다쳐서 내가 대타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한 선배가 ‘너는 거기 가봐야 땜방 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 그 말이 너무 듣기 싫었다.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서 굴러온 돌인 내가 박힌 돌을 빼내고 들어가게 됐다(웃음).

- 대표팀에 뽑힌 과정을 자세히 이야기해달라.
당시 김호 감독님이 팀을 맡을 때 박경화 기술위원장, 비쇼베츠 코치가 있었다. 박경화 기술위원장과 비쇼베츠 코치가 나를 추천해 김호 감독님이 뽑게 됐다. 1993년말 울산현대의 전지훈련지에서 실업팀과 연습경기가 있었는데 박경화 선생님이 나를 보러 전남 순천까지 내려왔다. 그때 비가 와서 잔디구장을 안 빌려준다고 해서 맨땅에서 경기를 했다. 쇠뽕(쇠로 된 스터드)이 박힌 축구화를 신고 맨땅에서 하니까 ‘짤그락 짤그락’ 소리가 나는데 공격수 입장에서는 발에 한 번 까이면 아주 죽는 거다. 그때 내가 터프한 모습을 보여 뽑힌 것 같다. 그리고나서 94년 초에 브라질로 전지훈련을 갔는데 거기서 대표팀에 뽑혔다는 통보를 받았다. 현지 호텔에서 미국 월드컵에 출전하는 대표선수가 나왔다면서 축하 파티도 열어줬다. 그래서 한국에 잠시 들러서 준비를 하고 미국으로 날아갔다.

- 당시 기분이 정말 좋았겠다.
당시 울산에서 차범근 감독님이 연말에 고과 평가를 했는데 내가 3년 연속 1등을 했다. 정말 매 경기를 죽어라 뛰었다. 미국 월드컵에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표 선수가 됐다고 해서 ‘이제 성공했다’ 하는 느낌은 아니었고, 소속팀에서 하던 것처럼 했다. 다만 대표팀은 책임감이 더 따르고, 바라보는 시선이 많아 부담감이 컸다. 국가를 대표한다는 마음가짐을 단단히 했다. 잘 해서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생각보다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에 올려진 느낌을 받았다.
1997년 1월 대표팀 숙소였던 남산 타워호텔에서 선수단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최영일(김병지부터 시작하는 맨 윗줄 왼쪽에서 네번째)과 고종수(김도훈부터 시작하는 맨 아랫줄 왼쪽에서 네번째)는 당시 한방을 썼다.
- 대표팀 주장은 언제 맡았나.
1997년과 1998년에 했다. 차 감독님이 대표팀에 부임(1997년 1월)하면서 내가 주장을 맡았다. 울산에 있을 때도 차 감독님 밑에서 주장을 했다.

- 대표팀 주장을 맡으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무엇인가.
고종수와 내가 방을 1년 정도 같이 썼다. 그때 종수가 가장 막내였는데 잘 아시겠지만 종수가 톡톡 튀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관리할 사람이 없는 거다. 그래서 나와 같은 방을 쓰면 좀 낫겠다 싶었다. 나와 나이 차이가 12년이 나니 아무래도 조심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종수가 사고를 칠 수도 있었는데 그러면 내가 때려죽인다고 했다(웃음). 종수와 같은 방을 쓰게 된 건 차 감독님의 뜻도 있었고,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 다른 에피소드도 들려달라.
그때는 대표팀 숙소가 파주가 아니고 남산에 있는 타워호텔(현 반얀트리 클럽앤스파)이었는데 호텔 뒷문으로 몰래 나가서 놀다 들어오는 선수들도 더러 있었다. 더 자세히는 이야기하면 안될 것 같다(웃음). 지금 생각하면 참 재밌는 일들이 많았다.
주장으로서 후배들이 따라오게끔 만들려고 하는 스타일이었다. 한 번은 훈련을 나갔는데 공에 바람이 없더라. 그때는 장비 담당이 따로 없어서 막내급 선수들이 그런 일을 맡아서 했는데 그걸 안 해놓았다. 그러면 내가 ‘너희가 정 하기 싫으면 내가 하겠다’고 하면서 직접 하기도 했다. 그러면 감독님은 ‘왜 네가 그런 일을 하냐’며 나에게 뭐라고 했다. 그래도 그렇게 했다.
최영일은 현역 시절 미우라의 전담 마크맨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 김호 감독님과는 각별한 관계로 알고 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을 함께 했다.
내가 중3일 때 김호 감독님이 동래고등학교 감독을 하셨다. 마침 나도 동래고에 가고 싶었는데 감독님이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나를 스카우트했다. 그런데 동래고에 입학할 때 감독님은 한일은행으로 가셨다. 그래서 나는 동래고를 졸업하고 동아대에 갔는데 그때 감독님이 울산현대 감독으로 계셨다. 그래서 내 경기를 보고 나를 울산으로 데려오셨다. 김호 감독님께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박종환, 허정무, 차범근 감독님과 대표팀 생활하면서 같이 해봤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지도자들과 함께 해봤다.

- 홍명보 전무와 함께 1994년 미국,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함께 했다. 그리고 협회로 나란히 들어오게 됐으니 ‘인생만사 새옹지마’다.
두 대회에서 중앙 수비수로 호흡을 맞췄다. 홍 전무는 내 후배지만 사람이 참 깊이가 있고, 말을 쉽게 내뱉는 스타일이 아니다. 협회에 들어오게 된 것도 홍 전무가 나를 찾아와 제의를 해줘 오게 됐다.

- 대표팀에서 일본 대표팀의 미우라를 철통 방어해 ‘족쇄맨’ ‘미우라의 그림자’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별명에는 만족하는가.
예전에 야쿠자가 나를 죽인다고 협박한 한 일도 있었다. 진짜다(웃음). 미우라를 처음 만난 게 비쇼베츠 감독님이 대표팀을 맡았던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이었다. 전반에 다른 선수가 맡았는데 골을 먹었다. 잘 못 맡겠다고 해서 내가 하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미우라와 악연이 됐다. 우리가 그때 3-2 역전승을 한 이후로 내가 은퇴할 때까지 미우라를 전담마크했다. 미우라가 참 잘 했는데 내가 나름 잘 막아서 일본이 그때 월드컵을 계속 못 나갔다.

- 미우라를 막는 비결은 무엇이었나.
내 스타일상 유럽 선수들보다 남미 선수들이 수비하기 좋았다. 유럽은 덩치가 커서 부담이 됐는데 남미 선수들은 힘이 없다. 미우라가 브라질에서 유학을 오래 했던 친구라 남미 스타일이다. 재주가 있지만 힘이 없고, 몸싸움을 싫어했다. 그래서 툭툭 밀면 짜증을 냈다. 그래서 내가 상대하기 좋았다. 지금도 한일전은 관심이 많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경기 나가기 전에 화장실을 세 번씩 갈 정도로 긴장이 됐지만 덕분에 더 주목을 받게 된 것 같다.
미우라와는 경기장에서는 치열하게 싸웠지만 끝나면 서로를 격려하던 사이였다. 내가 동아대 감독 시절에는 미우라가 있던 일본 프로팀(요코하마FC)에 우리 선수 두 명을 테스트 차원에서 보낸 적도 있다. 그래서 안부도 전했다. 지금 만나도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협회 부회장으로 취임한 최영일 부회장(가운데)의 모습, 왼쪽이 이임생 기술발전위원장, 오른쪽이 홍명보 전무이사다.
나의 동아대 감독 시절, 그리고 말 못했던 가슴 아픈 가정사
2000년 현역에서 은퇴한 최영일은 이듬해부터 모교 동아대학교 감독을 맡았다. 당시 해체 위기에 처한 축구부를 맡은 최영일은 팀을 다시 정상권으로 일으켜 세웠다. 권경원, 황일수 등 대표 선수를 배출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프로팀의 감독직 제의도 이어졌다. 그러나 그에게 예기치 못한 불행이 닥치고 말았다. 바로 아내의 말기암 선고와 죽음이었다.

- 2000년 은퇴를 한 뒤 2001년부터 동아대 사령탑을 맡았다.
그때 동아대에서 축구부를 해체한다고 해서 뒤숭숭했다. 나에게도 처음에는 코치 자리를 준다고 하더라. 감독직이 공석인데 코치직을 제의하니 뭔소리인가 했다. 알고 봤더니 나에게 코치직을 주면서 나를 희생양 삼아 팀을 없애려고 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축구를 좋아하는 교직원 한 분이 감독 자리를 주라고 해서 맡게 됐다. 그때 학교 관계자가 나에게 ‘잘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길래 나는 ‘현역 시절에 완장을 많이 차봤다. 대표팀에서도 선수와 감독의 다리 역할을 무난하게 잘 했다. 여기서도 선수단과 학교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잘 할 수 있다’고 했다.

- 동아대 감독으로 있으면서도 계속 프로팀의 제의를 받았다고 들었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님이 내가 울산 현대에 있을 때 구단주였다. 내가 주장이어서 이야기도 가끔 나누고 했다. 그리고 동아대에 있을 때 정 회장님이 부산아이파크 구단주이셨는데 아이파크에서 네덜란드로 유망주 훈련을 보낼 때 나도 같이 합류한 적이 있다. 그때 회장님이 아이파크에 와서 일해보지 않겠냐고도 하셨다. 수원삼성에서도 코치직 제의를 받았고, 실업팀 감독 제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동아대 축구부가 너무 어려워 갈 수 없었다. 운동부를 없애려는 학교의 시도를 내가 틀어막았다. 그런 상황에서 의리를 지키고 싶었다.

- 동아대를 거친 선수 중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다면.
대표팀 선수 중 권경원, 황일수가 내 제자다. 지방 학교에서 두 명이나 대표팀 선수를 배출했으니 많이 나온 것 아닌가. 학교에 국가대표 배출을 축하하는 현수막도 걸었다.

- 대회 입상과 동시에 좋은 선수를 길러내다가 2013년에 감독직을 그만 두게 된 사연은 무엇인가.
집안에 힘든 일이 있어서 2013년 시즌을 앞두고 그만 두고 야인으로 살았다. 그 때도 국내외 여러 곳에서 지도자 제의가 있었지만 할 수 없었다. 내가 가정을 지켜야하는 상황이어서 못 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사실 학교를 그만 둘 때쯤 아내가 말기암에 걸렸다. 수술을 받았는데 병원에서는 길면 6개월, 짧으면 3개월 정도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지도자 생활을 접고 아내와 당시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늦둥이 딸을 데리고 경기도 양평으로 요양차 들어갔다(최영일 부회장은 슬하에 아들 둘, 딸 하나를 두고 있다). 그래도 그곳에서 아내가 2년 6개월 정도를 살았다. 그렇게 아내를 2015년에 보냈다.

-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됐다. 그래서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때마침 홍 전무를 만났다. 지난 9월 김병지가 주최한 자선골프대회에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협회 부회장 합류 발표가 나기 3~4일 전에 홍 전무가 연락해 만나자고 하더라. 홍 전무가 ‘형님, 제가 이번에 전무이사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박)지성이도 같이 들어갑니다’ 하길래 축하해줬다. 그러더니 나에게 부회장을 맡아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시간만 있다면 괜찮겠다고 했다. 홍 전무와 같은 길을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부회장은 열심히 현장을 찾아다니며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나의 미래 "무책임하게 떠나는 일 없다. 발로 뛰겠다"
최영일 부회장은 선수, 지도자에 이어 행정가로서 축구에 이바지하게 됐다. 선수와 지도자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 팀을 챙기면 되지만 협회 부회장은 한국축구의 모든 팀을 챙겨야하는 자리다. 불편부당(不偏不黨)해야 하고, 제도 개선책을 통해 비전을 제시하는 일도 해야 한다. 그는 아직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기보다는 현역 시절 그랬던 것처럼 몸으로 부딪히며 이겨내겠다고 했다.

- 학원 및 클럽 리그과 관련해 산적한 여러 현안이 있다. 먼저 12년 동안 대학축구 지도자로 계시면서 느낀 대학축구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나.
주말리그를 치르면서 힘든 점이 있었다. 보통 리그 경기를 금요일에 하는데 수요일에 프로나 실업팀과 연습경기를 해야한다. 대학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취업시키는 게 가장 큰 목표이니 그들의 연습 파트너가 돼줘야 한다. 프로나 실업과 하려면 우리는 베스트 멤버를 넣어야 한다. 그리고나서 리그 경기를 치르는데 이 경기도 소홀히 할 수 없지 않나. 또 주말리그를 하면서 학교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니까 좋은 점도 있는데 이게 학교의 지나친 관심으로 독이 될 때도 있다. 그러면 사실상 15명 정도로 팀을 돌리는데 나머지는 자포자기다. 또 전국대회를 예전에는 학기 중에도 했는데 지금은 방학 기간에만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프로 스카우트들이 언제든 경기를 보러 올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많이 사라졌다.

- 초중고 축구 전반을 봤을 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초중고 지도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출산 문제, 야구 등 타 종목으로의 선수 이탈 문제로 선수 모으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숨은 인재를 발굴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는데 선수 수급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는 학교 팀이 클럽 팀보다 훨씬 불리한 여건이다.

- 위장전입 금지, 기숙사 폐지로 인해 인재 발굴이 어려운 구조다. 즐기는 축구, 공부하는 선수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정부의 방침이기도 한데 어떻게 풀어야할까.
사람 일이라는 것이 자주 만나다보면 풀리게 돼있다. 자꾸 만나면 정도 들고, 인간적으로 친해지면 제도적으로 풀 수 있는 방법도 생긴다고 믿는다. 설득과 협상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홍 전무와 내가 현장과 관계 부처 사람들을 자주 만나며 풀도록 노력하겠다.

- 설득과 협상으로 될 일이라면 이미 이전에 풀리지 않았을까.
나는 이전 일은 잘 모르겠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반드시 풀어야 한다. 그러려면 더 많이 만나야 한다. 그리고 협회가 홍 전무를 비롯해 임원진의 세대교체를 하면서 많이 젊어졌다. 더 많이 발전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본다. 나도 이왕 협회에 들어왔으니 미친듯이 일할 것이다.

- 학원과 클럽팀 간의 갈등도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다. 학원 팀은 그동안 우리가 한국축구 발전에 기여했는데 선수 수급의 불리함 등으로 홀대를 받는다고 하고, 클럽 팀은 클럽대로 차별을 받고 있다고 항변한다.
이제 부임했으니 현장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지도자의 복지 및 처우 개선이 필요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감도 부여할 것이다. 적은 비용을 들이면서도 아이들이 집중적으로 훈련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임기 내에 현안들을 모두 해결할 자신이 있는가.
나는 따로 임기를 정해두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무책임하게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이번에 함께 들어온 홍 전무, 이임생 기술발전위원장과 머리를 맞대고 좋은 제도를 만들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뛰어다니겠다.

글 = 오명철
사진 = 대한축구협회